문화의 희소가치

중학교 무렵(1995년 정도)만 하더라도 일본 애니메이션은 소위 '블루오션'이었다.
학교나 반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본다고 하면 다들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고,
비디오를 복제해서 친구들에게 떠주거나, 대만제 복제 시디를 보이면 다들 존경스러워 했다.
뭔가 아는 아이들만 접근할 수 있는 신기한 정보의 원천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감독 계보나 문화 계보를 꿰고 있는 친구는,
마치 락의 계보를 꿰고 있는 음악 마니아 친구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고교 무렵에는 플레이스테이션, 드림캐스트 등의 비디오 게임기에 심취하고,
뭔가 일러스트 같은걸 잘 그리거나 프로그래밍 같은걸 잘하는 아이는
테크니션으로 사람들에게 신기한 아이 취급을 받았었다.

하여간, 적어도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무렵(2001년도)까지는 이들에게 신기한 이미지가 있었다.
적어도... 대학 중후반 때까지는...

지금은 많은게 바뀌었다. 요즘의 고등학교에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반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 심취하는 아이는 일단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다른 그룹을 형성하는 듯 하다.
물론 어떤 학급의 경우에는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다들 즐겨 보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일단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문화에 심취하는 아이는 '오덕 속성'이 부여된다.

'오덕 속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
더이상 이러한 문화가 희소가치가 있는 문화가 아니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만 하더라도 극소의 PC통신망 동호회 등에서 몇몇 발빠른 사람들에 의해 나눠지던 얘기가
희소가치 있는 미디어의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이전에는 아예 PC통신망 같은게 없었으니, 사람들의 말과 말로 전달되었으리라.
그래서 이런 것에 심취하는 사람들은 스페셜리스트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오늘날은 이런 미디어는 클럽박스에 가서 10초면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세상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도 게임도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보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일반인의 눈에서 볼 때는 유치찬란하거나 특이해서 이상해 보일 따름이다.
(일반인들은 보통 일반적이지도 않으면서 일반적인 잣대을 가지고 이상함을 판단하곤 한다)


그래서, 모두가 알게 된 이 문화계에 성역이란 없는 것 같다.
남들 눈치보는 고상한 삶을 위해서는, 이 문화에 대해 모른척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2008/02/09 18:00 2008/02/09 18:00
2008/02/09 18:00 talk/hitorig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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